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잡다한정보

삼국지 조조 호평과 악평

by 너와나의 정보고리 2021. 12. 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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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위 태조 무황제 조조(曹魏 太祖 武皇帝 曹操, 155년~220년 음력 1월 23일)는 중국 후한 말기의 정치가이자, 무장이며 시인이다. 위나라의 초대 황제는 조조의 아들 조비지만 실질적으로 위 건국의 기틀을 마련한 것은 조비의 아버지 조조이다. 

 

삼국지 조조 호평

조조는 군사, 학문, 무예, 내정 모두에 탁월한 재능을 가졌을 뿐만 아니라 시문, 그림, 노래 등 풍류에도 매우 뛰어났다. 또한 조직을 이끄는 통솔력도 굉장했고 무엇보다도 수하들을 장악하는 리더십의 기교에는 가히 타의 추종을 불허했다. 또한, 인격 면에서도 감정에 치우치지 않고 당시로써는 가히 파격적이라고 할 만큼 철저하게 능력만을 가지고 인재를 선발하였다. 어떠한 분야를 막론하고 한 가지 분야에 뛰어나기만 하면 그 사람의 신분이 아무리 미천하거나 과거에 자신과 악연이 있다고 해도 조조는 크게 인정해줬다. 심지어는 아내를 고를 때도 능력을 보고 정하였는데, 최하급 신분인 기녀였던 변 씨도 능력을 인정받아 아내가 되었다.

또한, 조조 휘하의 많은 인물이 과거에는 조조에 대적했던 인물들이었음에도 불구하고 그들을 포섭한 것은 물론 과거의 주인 아래에서 활약했을 때보다 몇 배의 활약상을 펼칠 수 있게 능력을 끌어낸 것 역시 조조의 대단한 지도력을 잘 보여주는 것이다. 대표적인 인물들이라면 장료와 장합.

정치적 감각 역시 뛰어나 다양한 인재와 파벌들을 교묘하게 조종해내는 정치공학적 능력과 시대의 흐름을 정확히 잡아내어 최적의 결단을 내리는 시대적 선구안을 겸비한 인물이었다. 초토화된 중국의 경제를 재건하고 다른 어떤 군웅들보다도 앞서 정예화된 강병을 조직하는 데 성공하는 등 행정적인 능력 역시 후한말 등장한 군웅 중 가장 큰 실적을 낸 만큼 행정적인 수완도 당대 일류였다고 할 수 있을 것.

난세의 간웅이라는 별명답게 임기응변의 대가이기도 했으며 심리전의 달인이었다. 이러한 지략은 아군을 결속시키고 사기를 높일 때도 적을 교란하고 분열시킬 때도 모두 빛을 발했다.

비록 천하통일을 이루진 못했지만, 고대 중국의 정치적 경제적 중심지였던 북중국을 장악했는데 이는 당시 중국의 인구와 재화의 약 7할을 지배했다고 할 만했다. 실제로 오와 촉은 그 국력을 합쳐도 위나라만 못했고 이러한 위나라의 우위는 삼국시대가 끝날 때까지 단 한 번도 역전되지 않았다.

 

 

삼국지 조조 악평

조조의 가장 큰 단점으로는 잔혹하다는 것을 들 수 있다. 조조 일생일대에 있어서 최대의 오점을 남긴 서주 대학살이나 여포군이나 원소군 포로 학살 등 조조는 군사 민간인 가리지 않고 엄청난 수의 사람들을 학살한 학살자이다. 그 외에도 여백사 사건이나 황제의 아이를 밴 동 귀인을 반란 혐의로 죽이거나 복 황후 살해 그리고 길본의 난 때는 불을 껐다는 이유만으로 관료들을 반란군으로 몰아 죽이는 등 상당히 잔혹한 행보를 평생 보여준다.

혹자는 조조의 이런 행태를 마키아벨리즘이라고 옹호하지만 정작 자세히 들여다보면 마키아벨리즘으로 옹호하기에 조조의 행태는 냉혹하기는 했지만, 마키아벨리즘의 핵심인 도덕성을 넘어서는 이득 부분이 거의 없다. 우선 서주에서 벌인 학살도 결국 서주에서 그렇게 학살했는데도 도겸의 세력은 무너지지 않았고 학살을 벌이느라 본거지 연주 전체를 상실하기 직전까지 몰렸고, 그 뒤로 유비, 여포를 거치면서 조조의 후방을 10년 가까이 위협하는 세력이 되어버린다.

동 귀인의 경우도 임산부를 살해하는 잔혹성은 둘째로 치더라도 조조가 황제의 간청마저 무시하고 후궁과 황제의 자녀를 살해한 행태는 조조가 황제의 보호자가 아닌 황제를 위협하는 권신이라는 점을 명백히 보여주었고 이런 행태로 한나라의 관료들과 황실은 조조에게 완전히 등을 돌린다. 그리고 동 귀인 처형 당시 조조는 원소와 관도에서 대치 중이었는데 조조의 이런 행태는 상대방 원소에게 매우 큰 명분을 주게 되어 원소는 조조를 황제를 능멸하는 역적이라고 주장했고 이에 유비, 유표 등 유씨 황족은 물론 상당수의 한나라 관료까지 원소에게 동조하게 되는 결과를 낳았다. 그 뒤로도 수시로 잔혹한 행보를 이어나갔지만 이런 행태 때문에 역으로 불만은 더 커져 허도와 업에서는 조조가 약해질 때마다 반란 시도가 수시로 일어났다.

한편 조조의 행태인 냉철하다는 이미지와 달리 조조는 자주 감정적인 행동을 보여주는데 먼저 서주에서 학살을 벌이는 중에 연주에서 장막, 여포의 반란이 벌어지는데도 학살에 빠져있다가 연주가 거의 함락되기 직전에야 학살을 멈추고 돌아왔고, 그 외에도 장수가 항복했을 때 장수의 가족인 추 씨를 취하려 하다가 분노한 장수의 역습으로 아들과 전위를 잃고 본인마저 죽을 위기에 빠진 점, 동 귀인을 죽일 때도 원소와 전쟁 중인 상황에서 적대 세력들이 지켜보고 있는데도 황제를 무시하고 황제의 아이까지 바로 살해하고 길본의 난 때는 한나라의 관료들을 깃발 놀이로 처형시키는 등 오히려 조조는 감정적이고 비이성적인 행동을 상당히 자주 보여줬고 그럴 때마다 큰 피해를 보는 경우가 많았다.

의심이 지나치기도 했다는 것을 결함으로 들 수가 있겠다. 주불의가 위협이 될 것이라면서 또 조충이 죽은 이래로 그를 부릴 자가 없다는 일반인들이 감당하기 힘든 이유를 들어 말하면서 주불의를 자기 사람으로 쓰게 해달라는 조비의 간청도 거부하고 주불의를 제거하였다.

그리고 철저히 겉과 속이 달라서 그의 진정성을 이해하는 참모나 신하는 극소수였을 정도였는데 순욱이나 곽가, 그리고 사마의 같은 책사들 말고는 쉽사리 조조의 본성을 제대로 이해하는 인물이 드물었고, 이것이 조조 자신의 권위를 드높이고 그의 패업 성취에 크게 기여하기도 했지만, 한편으로는 진실성이 너무 없다는 혹평도 피할 수가 없다. 혹자가 말하듯 존경할 수는 있으나 좋아하긴 어려운 인물이었던 것.

원인이야 어찌 되었든 조조라는 인물이 굉장히 복합적인 캐릭터이다 보니 그런 포악한 면모도 있어서였을 수도 있으나, 하지 말아야 할 일을 한 것은 부정할 수가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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